고금면 청학리 청학동 그리고 옛집
내가 대학다닐 때인 1970년대 초까지도 고금면 청학동 가욱재에서 가교리 선착장까지 해변길이 훤하게 나 있었다. 청학동에서 먹골을 지나고 월장리를 거쳐 가교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큰 길이지만 돌아가는 도로여서 멀다.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가까운 해변길을 따라 장날 혹은 고향집을 방문할 적에 비렁길은 해변길로 다니곤 했다. 언제부턴가 통행이 뜸해지면서 길은 없어지고 나무와 풀이 길을 차지하고 다닐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. 흔적이 약간 남은 길은 가시덤풀과 나무가 무성해 가지 못하고 만조때라 바닷가를 걸어 내 고향 청학동 가욱재로 가 보기로 한다.
▼ 교성리 선착장 건너편에 있는 양식장 / 여기서 바닷가길로 청학동 가욱재로 발걸음을 옮긴다. 시멘트 포장도로가 잘 되어 있다
▼ 마량과 고금도를 연결하여 준 선착장 / 나룻배와 철부선이 부지런히 오갔었지
▼ 가교 선착장에 할 일을 잃고 외롭게 서 있는 철부선
▼ 바다건너 육지인 마량항
▼ 나룻배와 철부선을 멈추게한 고금대교
▼ 바다에는 김 지주대와 전복양식장 부표가 무성하고 저 멀리 해남 두륜산이 웅장한 모습을 나타내고
▼ 소석문에서 이어지는 덕룡산과 주작산 능선
▼ 청학동 가욱재로 이어지는 바다 시멘트 도로 / 산으로 나있던 옛길인 해변길로 가고싶지만 흔적도 없으니
▼ 바닷가에는 양식장 및 폐어장자재가 바다가를 더럽히고 있다.
▼ 나무가 해변까지 늘어져있네요
▼ 양식시설은 농어촌의 부를 가져다주고 젊은이들을 불어들이네요.
▼ 지주식 김양식 시설에 쓰인 지주대인 대 / 가볍고 물에 강해 전해부터 쓰였지요
▼ 어릴 적 돌로 찍어 굴을 따 먹은 기억을 더듬어 입에 넣어 보니 맛은 여전하네요
▼ 가욱재에 가까워지니 바위가 나타나 가기가 힘드네요
▼ 가욱재 선착장 방파제
▼ 이제는 좀 무거운 것들은 클레인으로 이동시키고
▼ 이 작은 포구에서 여름이면 수영하며 살았지요
▼ 마량과 고금면 가교리를 잇는 고금대교
▼ 강진의 덕룡산과 주작산 능선
▼ 어릴 적 넓게 보였던 포구가 지금은 왜 이리 좁아졌는지 ?
▼ 노 젓는 채취선은 어디로 가고 매끈한 어선들로 가득하네요
▼ 양식장에서 버린물이 쏟아지네요.
▼ 가욱재 바닷가에서 청학동으로 가는 길이 시멘트로 매끈하게 포장되어
▼ 높고 가파르던 악명높은 가욱재 고개는 왜 이리 낮아졌는지?
▼ 지게지고 소 몰고 수없이 넘나들던 힘든 고갯길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
▼ 고개마루에서 동네를 내려다본다/ 산천은 여전한데 옛 사람들은 어디로
▼ 사람이 많을 때 52호쯤 되었다는데 사라진 집들이 있네요
▼ 동네 서쪽의 큰산에 있는 가운데 거북바위와 우측 띠방맹이봉은 여전하고
▼ 솔창쪽 집들 / 몇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
▼ 고향집 행랑채터에 마늘만 무성하고
▼ 150살도 더 되어보이는 감나무 / 어릴적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놀았던 정든 감나무
▼ 선친께서 지었던 고향집 / 중학 3년정도를 이집에서 성장했네요 / 지금은 동네 기도처로 쓰이지요
▼ 집 뒷쪽에는 작은 옹달샘이 있었는데
▼ 마늘밭이 되버린 집 옆 공터 / 여기서 운동하고 장작도 패고
▼ 고향집에서 바라본 솔창 마을과 가욱재 고개길
▼ 고향집에서 내려다본 마을 진입로 / 장에 간 어머님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추억이
▼ 우리집 옆 가옥 / 김씨네가 잘 살았는데
▼ 집 아래 채전밭에 감나무가 3그루나 있었는데 / 지금은 없어지고
▼ 축대위에 담이 보이지 않지만 / 중학교 졸업후 뒷당캐에서 돌을 져 날라 담을 쌓지요 / 그 때 지게질을 덜 했으면 175cm는 되었을텐데
▼ 마을 중앙에 위치한 고향집 / 가리포 첨사, 궁궐의 기사장(정3품)을 지낸 고조때 천석궁이었다고 하네요
▼ 집에서 마을입구로 내려가는 골목길 / 김씨네 개가 사나워 맘놓고 지나다니지 못했던 기억도 나네요